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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4-05-02 16:5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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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봄날의 고전 읽기 모임
고전을 함께 읽는 모임을 만들겠다고 했더니, 대부분의 반응이 어렵겠다였다. 선생님은 누구인지, 어떤 책을 읽는지 의구심을 가지기도 했고, 자신은 책을 혼자서 읽고 정리하는 것이 좋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럼에도 동네에 서당이 열 리자 이런 저런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디자이너, 음악가, 청소년, 대학생, 주부, 퇴직자 등등, 모두 무언가 읽고 이야기 나누는 자리가 궁금해 모인 사람들이었다. 일주일에 한 권 씩 고전을 읽고 A4 한 장 분량의‘ 쪽글’을 서로 돌려 읽으 며 그렇게 <신촌서당>은 만들어졌다. 그리고 여전히 우리는 함께 책을 읽고 자신들의 이야기를 나눈다. 그곳에는 선 생도, 정해진 프로그램도 딱히 없었다. 그저 2개월 동안 읽을 고전을 정해 부지런히 읽고 서로 이야기 하고 듣기를 했 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글을 쓴 사람들이 궁금해졌고, 그렇게 이야기는 단순히 이야기로 끝나지 않았다. 그곳에 한번 가보고 싶었다.

루쉰의 소설 <쿵이지>, 그 곳에 가 보다
소흥에 다녀왔다. 내가 소흥에 간다고 했을 때 당신은 그곳이 궁금하다고 했다. <쿵이지>는 루쉰의 단편소설 중 하나인데, 고향 마을 단골술집이 배경이다. 그곳이 바로 소흥이다. <쿵이지>는 아마도 루쉰이 살던 동네의 어떤 사람에 대한 이야기일테지.
소설의 내용은 이렇다.
함형주점이라는 동네술집은 마을 사람들이 자주 모여서 담소를 나누는 곳이다. 이곳에 쿵이지라는 사람이 가끔 들르는데 행색은 초라하지만 글을 좀 배웠는지, 사람들에게 문자를 써 가며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알고 보면 그는 생활이 궁색해 돈을 빌렸다 떼먹기도 하고, 책을 필사해 준다고 해 놓고는 그 책을 팔아먹기도 해서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당하는 처지였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는 함형주점에서는 외상 없이 술을 마셨다. 물론 손님들의 놀림감이 되기 일쑤였지만. 그러던 어느날, 동네 부잣집 친척행세를 하던 것이 발각되어 뭇매를 맞고 반병신이 되어 한동안 자취를 감췄는데, 어느날 동전 한 푼을 들고 함형주점에 나타나 술 한잔을 하고는 더이상 보이지 않게 된다.
쿵이지가 자주 들르던 함형주점에 앉아 그가 늘 주문하던 삶은 콩과 따뜻한 술 한잔을 마시며 잠시 앉아 있었다. 술집 앞에는 쿵이지의 동상이 서 있었는데 약간 구부정한 모습이었다. 사실 <쿵이지>는 그냥 스쳐 읽었던 소설이었는데, 이 작품이 내게 계속 남아있게 된 것은 함께 고전읽기를 하던 한 주부의 감상평 때문이었다.
고전을 읽다보면 내가 그냥 스쳐지나갔던 이야기도 어떤 사람에게는 밑줄을 긋게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 <쿵이지>도 마찬가지였다. 이 이야기를 나에게 남게 해 주었던, 주부였던 그분은 쿵이지 이야기를 읽으며 자신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고 했다. 그분은 본인도 사실 공부를 했었고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었는데 지금은 집에서 아이를 키우고 있다고 하시며, 이 소설을 읽으면서 자신이 공부하던 그 시절이 떠올랐고 그렇게 신나게 배우던 시절을 까맣게 잊고 지냈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됐다고 했다. 그리고 몰락한 지식인의 모습이 자신의 모습과 겹쳐져 가슴이 아팠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다시 <쿵이지> 속으로 들어가보니, 이야기가 다른 모습으로 내게 다가왔다. 놀림감이었던, 조금은 우스꽝스럽던 쿵이지의 행동들이 안타까웠고, 당당하게 술 마실 곳 한 군데 정도는 남겨 놓고 싶었을 그의 마음이 이해되기도 했다. 그 이후 <쿵이지>는 내 기억 속에 계속 남아 있었고 중국에 갈 기회가 생겼을 때 당연하듯 소흥을 목적지로 정했다. 루쉰의 고향, 쿵이지의 술집.

고전의 힘, 공명하기
고전의 힘은 그런 공명에 있지 않을까. 오랫동안 살아남은 이야기, 사람들이 사람들에게 전해준 책. 그 안에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픈 어떤 공감이 담겨있다. 그런 공감들은 ‘지금’을 살고 있는 나와 겹쳐져 자신의 깊은 곳에 자리 잡은 한 곳을 건드려준다. 그렇게 생각은 생각을 부르고, 나의 이야기는 경청으로 이어진다. 

다시 고전 읽기 모임으로
<신촌서당>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동네사람들이 와서 함께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을 꿈꾸면서. 옛날 서당에서처럼, 조금이라도 읽고 이야기를 듣는 배움의 장을 동네에서 열어보고 싶다. 그곳에서 아이들도, 어머니도, 아버지도, 친구들도 고전을 함께 읽고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어떤 마음이 들었는지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삼삼오오 모여, 그곳에 가보는 거다. 쿵이지의 그 술집, 정약용의 그 서당, 티벳의 그 마을, 교토의 그 집. 그곳에 다녀오면 다시 이야기를 전하고 그 이야기의 배경이 왜 그곳이어야 했을지를 상상해 보는 것, 그리고 그런 것들이 지금의 내 삶에 좋은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같이 볼 수 있었으면.


▶ 피터(김용진)
정치학과 생물학을 공부했다. 신촌 작은대학, 고려대 생명과 죽음, 이화여대 통섭원, 간행물 윤리위원회 인문-사회, 풀뿌리 사회지기 학교에서 고전을 읽는 모임을 이끌었다. 기타로 음악을 배우고 함께 고전을 읽는 <신촌서당>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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