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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2-10-10 17:3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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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이후에도 조선 왕조의 부흥을 꾀한 군주와 대신은 많았다. 정조와 흥선대원군은 그들 가운데서도 특히 주목되는 존재들이었다. 그 두 사람은 영조(재위 1724~1776)의 자손으로서 각종 개혁을 통해 민생을 살리고 국력을 키우고자 노력했으며, 그 성과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서구 문명의 도전에 적절히 대응하기에는 힘이 닿지 않았다.


‘문체반정’으로 승부한 정조
정조(재위 1776~1800)는 ‘조선 후기의 르네상스 군주 정조’로 불린다. 그러나 나는 정조시대를 이해하는 새로운 코드로서 ‘문체반정(文體反正)’에 주목한다. 정조는 성리학을부흥시킴으로써 크고 작은 당면과제를 해결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일반의 지레짐작과는 달리 정조는 보수 개혁군주였다. ‘문체반정의 군주’였던 것이다.
정조는 왜 보수적인 왕이 되었을까. 알다시피 그가 왕위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왕이 된 다음에도 영조의 계비(繼妃) 정순왕후 일파의 저항이 심했다.

여러 대신들(벽파)도 늘 정조의 통치를 방해했다. 자연히 정조의 권력 기반은 불안정했다. 그래서 정조는 국시(國是) 성리학에 기대어 위기를 돌파하고자 하였다. 그
는 자신의 정통성을 성리학에서 찾았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리더십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가. 진정한 통치자는 ‘군사(君師)’
정조는 탁월한 성리학자였다. 그는 왕이될 때까지 이미 많은 공부를 했지만, 왕이된 다음에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그는 문집인 『홍재전서(弘齋全書)』를 후세
에 남겼는데, 184권, 100책에 달하는 거질이었다. 왕으로서 문집을 남긴 이는 정조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정조는 ‘군사(君師)’ 즉, 백성의 임금인 동시에 스승이 되기를 꿈꾸었다. 과연 정조의 학문은 세종대왕과 견줄 정도로 대단했다. 그러나 정조는 정적들의 반대와 견
제를 의식해야 했기 때문에 학문적 관심범위가 상당히 제한되어 있었다. 그가 기성 이데올로기인 성리학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이유가 거기 있었다.

재위기간 동안 정조는 탕평책을 실시했다. 그 자신이 당쟁의 피해자였기 때문에 정조는, 당쟁의 종식을 염원했다. 탕평책은 이미 영조가 썼던 것이지만, 정조의 탕평책은 약간 달랐다. 그는 그동안 탕평책에 호응하지 않았던 강경론자들(峻論)을 조정에 불러들였다(준론峻論 탕평책). 결과적으로, 정조의 조정에는 상당수 남인과 소론 학자들도 서게 되었다.

특히 남인은 재상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을 비롯해 여러 소장학자가 왕의 총애를 받았다. 하지만 정조의 탕평책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러자 정조는 비밀리에 어찰정치(御札政治)를 폈다. 가령 벽파의 우두머리 심환지(沈煥之, 1730~1802)에게 왕은 비밀 편지를 보내, “나는 네 편이다. 내일 조정에 와서 이런저런 주장을 해라. 그러면 내가 이것은 들어주고 저것은 거절할 것이다”라는 식이었다.

그의 어찰정치는 일반의 호평을 받는다. 비밀편지로 정조는 당파적 갈등을 극복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정조의 어찰 정치는 도리어 군신 간의 정치적 신뢰를 해쳤다고 본다. 정조가 읽고 나서 곧 없애라고 주문했던 많은 비밀 편지들이 남아있다는 사실, 이것은 대신들의 불신을 증명하는 것이다.

‘군사’이기를 바랐던 정조라면 어찰정치를 하지는 말았어야 했다. 비밀편지로 그가 비밀거래를 일삼았다는 사실은, 정치적 반칙을 일삼았다는 뜻도 된다. 이것은 정조의 리더십을 망가뜨리는 것이다.


나. 규장각이라는 무기
정조의 정치적 리더십을 뒷받침하는 또 다른 수단은 규장각이었다. 세종의 집현전을 모방한 이 기관을 통해 정조는 자신의 통치를 도울 관료들을 양산했다. 그는 규장각을 일신해 초계문신제도(抄啓文臣制度)를 실시하기도 했다. 재기 있는 소장파 문신들을 뽑아 그들을 교육하고, 성과를 시험해 임용과 승진에 참고했던 것이다.

모두 열번에 걸쳐 정조는 100명의 초계문신을 발탁했다. 그들이야말로 왕조의 중흥을 위해 정조가 착수한 각종 사업을 주도했다.
규장각은 문물제도의 정비와 출판에도 앞장섰다. 『속오례의(續五禮儀)』, 『증보동국문헌비고(增補東國文獻備考)』, 『국조보감(國朝寶鑑)』 등 규장각이 간행한 출판물
은, 국가가 요구하는 통치 자료를 변화된 시대환경에 맞게 수정 증보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정조는 규장각 출신 인사들을 거느리고 ‘문체반정’을 추진하였다. 그들은 성리학만이 올바른 학문이라는 전제 아래, 그 밖의 새로운 학문과 기예를 사학(邪學), 즉
그른 학문이라고 낙인찍었다. 특히 문제가 되었던 것은 천주교였다.


다. ‘문체반정’의 한계
18세기 후반 한국사회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다. 명나라 말기와 청나라 초기 중국에서 유행하던 새로운 문예 사조가 물밀 듯이 한국으로 유입되었다. ‘소품(小品)’과 ‘패관문학’이 그것이었다. 새로운 문예사조는 경험주의 성향을 띠었고, 인간의 주관적 감정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형이상학적이고 보편주의를 표방한 성리학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풍조였다.

새로운 문예사조는 정조의 조정이 엄금하는 천주교나 조선왕조의 몰락을 촉구하는 『정감록』 사상과 결합하였다. 강이천을 비롯한 일부 지식인들은 새로운 종교, 정치 및 사회체제를 위해 문화투쟁을 전개했다. 정조와 규장각 인사들은 이를 용인하지 않았다. 그들은 ‘문체반정’을 내세우며 낡은 성리학적 규범과 가치를 회복하고자 노력하였다. 정조의 시대는 한국사의 중요한 분수령이었다. 우리가 원했든 원치 않았든지 그때 한국사회는, 서구중심의 세계질서 안으로 편입되고 있었다. 하지만 정조는 서양의 종교와 문물은 고사하고, 중국으로부터 들어오는 새로운 자극마저 도외시하였다.

라. 문예 부흥의 실상
정조의 통치기간에 상당한 문화발전이 일어난 것도 사실이다. ‘조선중화의식(朝鮮中華意識)’이 고취되어 국가적 자긍심이 높아졌다. 진경산수(眞景山水)로 불리는 ‘국화풍(國畫風)’도 등장했다. 왕은 남인 실학파와 노론 북학파 등도 격려하였고, 소외된 중인(中人)들의 위항(委巷) 문학에도 관심을 뒀다.

백성을 괴롭혀 온 형정(刑政)도 크게 개혁되었다. 서자들의 지위를 높이려는 조치도 있었고, 원성이 자자했던 노비추쇄법(奴婢推刷法)도 폐지되었다. ‘통공정책(通共政策)’이 추진되어, 소상인들의 이익도 어느 정도 보장되었다. 잊힌 역사적 인물들도 재발굴되었다. 정조는 이순신을 비롯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의 충신, 효자, 열녀들을 추가로 포상했다. 사화와 당쟁의 와중에 놓친 선비들의 업적을 재평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조의 노력은 한 가지 목표로 귀착되었다. 성리학 중심의 구체제를 더욱 강화하는 일이었다. 구질서를 재확립함으로써 정조는 새로운 변화를 요구하는 시대적 요구를 차단하고자 하였다.

결론적으로 말해, 정조는 탁월한 자질을 갖춘 왕이었으나 시대적 한계를 넘지 못했다. 그가 다스리던 조선왕조는 서구중심의 세계질서에 편입되기 시작했지만, 왕은 그점을 외면하였다. 그리하여 정조는 눈앞에 다가온 새로운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격랑 속에 침몰한 흥선대원군의 리더십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1898)은 독특한 인물이었다. 어린 나이로 즉위한 고종(재위 1863~1907)의 생부로서 그는 10년 동안 국정을 좌우했다. 실권을 쥔 역사상의 유일한 대원군이었다. 그는 세도정치를 종식하게 하는 등 많은 업적을 쌓았다. 그러나 후세는 그를 쇄국정치의 장본인이라 비판하고, 19세기 말 근대화(개화)에 실패한 근본적인 이유가 그의 잘못에있다고 혹평했다.

가. 왕보다 강했던 대원군
흥선대원군은 웬만한 왕들보다 더 강력했다. 조선 후기 여러 왕이 한 번도 실행에 옮기지 못한 굵직한 사업들을 그는 대부분 달성했다. ‘조선 왕조의 마지막 개혁자’라는 평가를 받을 만했다. 그의 업적은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대원군은 단시일 내에 세도 정치를 마감했고,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을 재건했다. 그는 왕실의 권위를 회복했던 것이다. 둘째, 대원군은 민생을 구제했다. 전국의 서원 2만여 개 중에서 48개의 주요 서원만 남겨 놓고, 그는 나머지를 몽땅 철폐했다. ‘호포제(戶布制)’를 재정해 양반도 일반 평민과 마찬가지로 세금을 물게 했다. 셋째, 그는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웠다. 미국과 프랑스의 침략도 성공적으로 방어했던 것이다. 대원군의 정치력은 과연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만했다.

나. 조직 관리의 귀재, 거침없이 개혁하다
대원군은 조직과 관리에 뛰어났다. 집권하기가 무섭게 그는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에 거주하는 부호들과의 협력관계를 강화했다. 그들은 대원군을 재정적으로 후원했고, 대가로 벼슬을 얻었다. 고무된 대원군은 평소 마음먹은 굵직한 개혁들을 실행에 옮겼다. 중간에 실수도 없지 않았지만, 그의 과감한 결단에 힘입어 조정의 기능이 빠른 속도로회복되었다.

대원군이 국정을 담당한 지 불과 수년 만에 나라 살림이 달라졌다. 비었던 국고가 다시 찼다. 탁월한 조직 관리의 결과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외침을 겪은 뒤 좀체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던 나라 살림이 되살아난 것이다.

다. 대원군의 비운
그에게도 곤혹스런 문제가 있었다. 그의 집권 당시(1864) 중국은 내우외란에 극도로 시달렸다. 아편전쟁(1840~1842, 1856~1860)으로 홍콩을 영국에 할양해야 했고, ‘태평천국의 난’으로 말미암아 혼란의 도가니에 빠졌다. 설상가상으로 북쪽에서는 러시아가 지속해서 남하정책을 강행하였다. 동아시아의 국제정세는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런 한국사회에 천주교가 성행했다. 천주교도는 유럽의 강국 프랑스를 배경으로 삼았다. 정조 때부터 가시화되기 시작한 서구의 침략위협이 이때 이르러 엄연한 현실이 되고 말았다. 대원군은 그 점을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사태를 해결할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조선왕조는 일본처럼 서구화를 추진할 물적 바탕도 없었고, 중국처럼 서양 세력으로부터 곤욕만 당하는 것도 차마 못 할 일이었다. 그 시점에서는 ‘개화’를 선택했다 하더라도, 결과를 낙관하기 어려웠다. 결국, 대원군은 나라의 문을 꼭 잠그기로 했다. ‘내수외양(內修外攘)’ 즉, 국내정치에 힘써 지치(至治)를 이루고, 밖으로는 외적을 물리쳐 평화를 유지한다는 고전적인 정책이 그의 선택이었다. ‘척화비’에 아로새겨진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이것이었다.

라. 쇄국정책의 평가, 어려운 과제
대원군의 개혁정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도 그의 완고한 쇄국정책에 대하여는 고개를 젓는다. 그때 대원군이 나라를 개방했더라면 일제에 의한 굴욕적인 패망은 없었을 것이라는 한탄이 쏟아진다.

그러나 그게 과연 그렇게 간단한 일이었을까. 차라리 대원군의 쇄국정치는 정조의 ‘문체반정’보다 오히려 합리적인 선택이 아니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할 때도
잦다. 설명을 조금 보태보자. 정조의 쇄국은 그의 자발적 선택이었다. 그때는 서양이 무력으로 동아시아를 유린하기 전이었다. 따라서 그때 ‘개국’과 ‘통상’을 선택했
더라면 서구와의 유대를 평화적으로 도모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대원군의 시대는달랐다. 준비도 없이 무턱대고 나라를 개방했다가는 침략대상으로 전락하기에 십
상이었다.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인도,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와 남아메리카 대륙은 일찌감치 개방을 강요당했지만, 저들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도 우리는 공허한 주장만 되풀이한다. 대원군이 쇄국 정책을 펴지 않았더라면, 우리도 일본처럼 근대화에 성공했을 것이라고 말하기는 쉽다. 하지만 그건 억측일 뿐이다. 개화는 옳고 쇄국은 나쁘다는 이분법을 지양하자. 21세기 한국사회도 과연 어떻게, 얼마나 개방해야 할지 속도 조절하기가 쉽지 않다. 중요한것은 언제나 외세에 휘둘리지 말고, 주체적으로 결정한다는 원칙이다.



글 백승종 마을공동체문화연구소 대표(전 서강대학교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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