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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2-08-11 11: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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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한국사회를 지배한 것은 성리학이었다. 조광조(趙光祖, 1482-1519, 호는 靜庵)와 이이(李珥, 1536-1584, 호는 栗谷)는 그 시대 성리학계의 큰 별이었다. 그들 말고도 서경덕과 이황 등 기라성같은 성리학자들이 쏟아져 나왔다.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그들 모두가 조광조를 스승 또는 선배로서 높이 떠받들었다는 점이다. 특히 이이는 현실정치에서 조광조가 못다 이룬 꿈을 완성하기 위해 정성을 쏟은 것으로 정평이 있다.



조광조는 한양에서 태어났다. 그의 고조할아버지 조온(趙溫, 1347-1417)은 태조 이성계의 조카로 조선 건국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개국공신(2등)이 되었다. 조온은 정도전을 살해하는데도 앞장섰다. 잘 나가던 조광조의 집안은 할아버지 조충손 대에 이르러 갑자기 기울었다. 조충손은 안평대군과 가깝다는 이유로 유배형을 받고는 불귀의 객이 되었다.

조광조의 일생에 하나의 분수령이 된 것은 김굉필(金宏弼, 1454-1504, 호는 寒暄堂)과의 만남이었다. 역시 한양출신인 김굉필은 영남사림의 영수 김종직(金宗直, 1431-1492, 호는 畢齋)의 학맥을 이어받은 대학자였다. 김굉필은 1498년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평안도 희천으로 유배되었다. 그때 조광조는 이 대학자를 찾아가서 제자가 되었다. 그 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김굉필은 사형을 당하였고, 청년 조광조는 깊은 충격에 빠졌다.

그러나 낙망하지 않고 오직 학문에 정진한 결과, 조광조는 중종의 조정에 등용되었다.(1515년) 그는 중종의 신임을 바탕으로 개혁정치의 꿈을 한껏 펼쳤으나 왕의 신임은 4년 만에 끝나버렸다. 그리하여 1519년 겨울, 조광조는 38세의 젊은 나이로 사약을 마시고 유배지 능주(전남 화순)에 눈을 감았다.

이렇다 할 죄목도 없이 사약을 받았지만, 그는 죽음을 거부하거나 억울해하지도 않은 채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태연하였다. 가족에게 보낼 마지막 편지를 쓸 때도 그의 붓끝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조광조의 죽음은 비참하고 초라했지만, 후세 사람들은 거기서 광명정대한 도덕군자의 참모습을 목격하였다. 이윽고 조광조의 삶과 죽음은 하나의 전설이 되었다. 이황이나 이이 조광조 같은 석학들에게도 조광조는 감히 다가설 수 없는 사표가 되었다

열정의 리더 조광조의 도덕적 리더십
조광조의 리더십은 도덕성에 토대를 두었다. 그에게는 언제나 뚜렷한 명분이 있었다. 공명정당하지 못한 일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그런데 도덕성이 높은 선비는 깐깐하기만 하고 추진력이 없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조광조는 달랐다. 그에게는 정열이 있었다.

중종에게 경전을 강의할 때도 여간해서 중도에 그만두지 않았다. 중종은 조광조의 열성 때문에 식사시간을 놓치기도 하였고, 피로를 이기지 못해 하품을 하고, 졸다가 팔꿈치가 팔걸이에서 미끄러지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중종은 조광조의 열성과 달변에 눌려 그가 요구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다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추진력도 뛰어났다. 반대파의 잘못을 그는 추상같이 질타했다. 적의 실체를 뚜렷이 드러냄으로써 동지를 결집하는 응집력도 탁월하였다. 그는 동지들과 이념을 공유하였고, 그에 배치되는 집권세력을 가차 없이 공격하였다. 정적들에게 조광조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조광조에게 인간적 향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에게는 사람들을 사로잡는 매력이 있었다. 동지들과의 우정도 대단하였다. 때때로 그는 한충, 김정 등과 밤새껏 대화를 나누었다.

그들 세 선비는 베개도 하나, 이불도 하나를 사용하였다. 조광조는 벗들에게 “죽을 때까지 이렇게 할 수 있겠느냐?”라고 물었고, 그들은 “그렇게 하리라”고 다짐하였다. 과연 그들은 평생 서로를 배신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신의를 지켰다. 그들은 외롭지 않았다

이상주의자 조광조 vs 현실주의자 중종
조광조는 유교적 황금시대의 도래를 확신하였다. 증광문과시험에 합격했을 때 그는 “공자에게 3년의 기회를 주었더라면 요임금과 순임금이 펼친 중국 고대의 이상정치를 실천할 수 있었다”고 대답하였다. 그는 황금시대의 구현이 당대에도 가능한 일이라고 믿었다.

이상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조광조는 끊임없이 중종을 설득하고 교육했다. 왕도정치의 성패가 왕에게 달려 있다고 믿어서였다. 중종이한 사람의 위대한 군사(君師), 즉 철학적 군주로 거듭나게 하는 것이 조광조의 목적이었다. 그는 조정의 도덕 교사였다. 그러나 한 가지 큰 문제가 잠복하여 있었다. 중종이 문제였다. 세종처럼 탁월한 군주라면 모를까 중종처럼 평범한 인간으로서는 왕도정치의 실현가능성이 적었다.

조광조가 이상주의자였다면 중종은 현실주의자였다. 왕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할만한 포부와 능력을 갖지 못하였다. 그가 왕이 된 것도 순전히 우연이었다. 왕은 조광조의 요구가 너무 지나치다고 판단하였다. 결국 왕은 조광조를 배신하였다. 그를 죽인 것은무능한 조선의 왕, 중종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지나치게 목전의 이익만을 추구한다. 길게 바라보고 공적 이익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 너무나 드물다. 조광조처럼 죽기를 각오하고 이상정치의 실천을 위해 전력투구하는 이가 우리들 가운데 함께 있었으면 좋겠다. 현실적 욕망으로 가려진 우리의 두 눈을 번쩍 뜨게 할 그의 날카로운 음성은 어디에 숨어 있는 것일까.

이이의 조화와 실용의 리더십
이이는 성리학을 집대성한 대학자였다. 실무에도 밝아 이조판서와 병조판서를 지냈다. 일본의 침략을 염려해 십만 양병설을 주장하였고, 민생을 염려해 사회적 폐단을 파헤친 「만언봉사」를 선조에게 올린 일도 있었다. 이이는 극단적인 선택을 지양하고 늘 조화를 꾀하였으며, 실용정신에 입각해 나라 일을 정성껏 보살폈다. 그의 개혁안은 조광조의 수정판이었다.



조광조의 학맥을 이은 조선 최고의 엘리트
그는 평생 아홉 번의 과거 시험에 연달아 장원을 차지했다. 1564년(명종 19)의 문과시험에서는 초시, 복시, 전시에서 모두 장원을 기록하였다. 진사시험은 13살 때 합격하였다. 오늘날로 말하면 문학박사학위를 13살에 획득한 셈이었다. 요샛말로, 이이는 ‘공부의 신’이었다.

이이의 벼슬길은 순탄했다. 조광조와 비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 역시 고속승진을 이어나갔다. 삼십대에 벌써 승정원 동부승지, 우부승지를 역임했고, 황해도 관찰사를 지냈다. 사십대 초반에는 이미 장관급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수명이 길지 못해 49세로 세상을 떴다. 그래도 굵직한 벼슬은 다 지냈다. 예문관 대제학, 홍문관 대
제학에 이조와 병조의 판서를 두루 지냈다. 이미 젊은 시절에 사신으로 중국 명나라를 다녀왔으며, 공무로 늘 바빴는데도 여러 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소년시절 이이는 조광조의 제자 백인걸에게 수학하였다. 그리하여 이 수재는 조광조를 가슴에 품고 청년시절을 보냈다. 23살에는 예안 (현재 경북 안동)으로 당대의 석학 이황을 찾아가 성리철학에 관하여 심오한 문답을 나눴다. 그때 이황은 이이의 학식에 감탄하여 “후생이 가외(可畏)다(즉 후배라도 두려워할만하다)”고 말하였다고 전한다. 이이의 철학적 깊이는 이미 노대가를 감동시킬 만하였다.




조광조를 극복한 이이
조광조와 이이에게는 큰 차이점이 있었다. 조광조는 실무에 종사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이이는 실무에 두루 밝았다. 특히 그는 인사실무에 정통하였다. 철학자였지만 군사적인 사무에도 밝아 병조판서까지도 지냈을 정도다.

더욱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 조광조는 현실을 뜯어고쳐 당장에 성리학적 이상 국가를 실현하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이이는 지금은 개혁을 시작할 때에 불과하다는 입장이었다. 그는 경장(更張)을 주장했던 것이다.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조금씩이라도 경장하는 것이 옳다. 그대로 놔두면 조선왕조는 썩어
무너진다. 날마다 어느 한 구석이라도 뜯어고치자”는 것이 이이의 생각이었다.

이이는 복잡한 현실을 결코 외면하지 않았다. 그는 문제점을 일일이 기록하여 개선책을 제안했다. 거시적인 차원에서 거칠게 접근한 것이 아니라, 실천가능성을 염두에 둔 구체적인 개혁방안을 궁리하였다. 그는 조광조처럼 불타는 정열로 덤벼들지 않았다.

이이는 차분하면서도 집요했기 때문에 퍽 옹골찼다. 동시대의 석학 이황은 현실문제로부터 벗어나 있었다. 이황은 조광조가 보여준 실패의 역사를 통해 세상이 녹록치 않다는 사실을 절감하였다. 또 자신에게 주어진 천품은 한 사람의 성리학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래서 이황은 항상 몸가짐을 엄숙 단정하게 지키며 성리철학을 궁구하여, 제자들에게 진리를 전해주는 것에 만족하였다. 이황은 시대의 양심이었고, 타고난 천성대로 산 순수하고 지고한 인물이었다.

이황에 비하면 이이는 실천적이고 기민했으며 날카로웠다. 그가 쓴 「석담일기」에 그런 점이 잘 드러나 있다. 이 책을 읽어보면, 누구도 이이의 날카로운 인물평을 무사히 통과하지 못했다. 이이에게 단점을 들키지 않은 경우가 퍽 드물었다.



경장’을 위한 이이의 헌신
이이는 저술을 통해 조선사회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모색하였다. 그의 개혁안은 「동호문답」, 「만언봉사」,「성학집요」 등에 실려 있다. 「동호문답」의 핵심은 결국 하나였다. 나라를 옳게 다스리려면 도덕을 바로 세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조광조와도 같은 생각이었다. 「만언봉사」에서는 현실사회의 폐단이 매우 구체적으로 거론
되었다. 그는 민생에 초점을 둔 부국강병을 꿈꾸었다. 끝으로 「성학집요」에서는 성리학적 이상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의지를 결코 포기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이는 자신의 견해를 실천하는 데 보다 큰 관심을 가졌다. 한마디로 그의 리더십은 조화와 실용에 초점을 둔 것이었다. 현실과 이론을 조화시키되 서두르지 말고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올라가자는 것이 그의 입장이었다. 이이는 점진주의자였던 것이다.

점진주의 노선을 고수하였기 때문에 그가 미처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도 있었다. 가령 그는 일본의 침략위협을 깊이 통감한 나머지 ‘10만 양병설’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여러 대신들은 이를 두고 민심을 소란하게 하는 부당한 처사라며 반대하였다. 식견이 높은 유성룡까지도 반대한 바람에 이이의 주장은 좌절되고 말았다. 안타까
운 일이었다.

이이가 제시한 개혁안은 근본적인 의미에서 오늘날에도 빛을 잃지 않았다. 국가의 기강은 여전히 어지럽고, 관료주의로 인해 민생문제가 해결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매사에 흑 아니면 백만 외치는것이 우리사회의 큰 문제점이다. 날카로운 지성의 소유자였으면서도 시종일관 조화를 추구한 이이가 더욱 그립다. 우뚝 선 성리철학자였으면서도 누구보다 실무에 밝았고, 굵직한 현안을 한 가지씩 단계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를 도모하였던 그에게서 배울 점이 너무도 많다.





백승종 마을공동체문화연구소 대표(전 서강대학교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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