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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5-02-02 17:29:58
  • 수정 2018-09-27 14: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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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암 조광조는 중종반정 이후 조정에 출사하여, 그가 꿈꾸던 유교적 이상 정치를 구현하기 위해 다양한 개혁을 적극적으로 시도한 불세출의 개혁정치가다. 조광조는 성리학으로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삼아 백성을 덕과 예로 다스린다는 유교적 왕도정치를 이상으로 하는, 이른바 지치주의(至治主義) 도학정치를 실현하려 했다. 그의 개혁정치는 훈구파의 반발에 의해 기묘사화로 물거품 됐으나, 그가 꿈꿨던 유교적 이상사회는 이후 후학들에 의해서 조선 사회에 구현되도록 하는 초석이 됐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진다. 현재 우리 사회는 위기와 개혁이라는 혼란 속에 빠져있다. 온고지신이라는 말처럼 과거의 역사에서 어떻게 개혁할 것인지에 대한 미래의 지혜를 찾을 필요가 있다. 그래서 지금 주목해야 하는 리더는 목숨을 걸고 이상을 위해 개혁을 일으켰던 자기희생의 리더십을 가졌던 조광조다.

어려서부터 원칙과 실천 강조하다
조광조는 원칙을 매우 중시한 인물이었다. 원칙을 준수하면 세상은 살기 좋아질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평소에도 의관을 단정히 갖추고 언행도 성현의 가르침을 따라 절제하는 생활을 실천했다. ‘윗사람이라면 더 모범을 보이는 게 맞다’는 신념에 따라 윗사람일지라도 원칙에 어긋나면 가차 없이 비판을 가했다. 이런 성향을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있다. 조광조는 무오사화로 유배 중이었던 김굉필을 스승으로 모시고 성리학을 배웠다. 그런데 어느 날 김굉필이 연로한 어머니께 드리려고 꿩을 잡아 말리고 있었는데 그만 고양이가 물고 달아나 버렸다. 그래서 그는 꿩을 잘 지키지 못한 여종에게 큰 소리로 혼을 내고 있었다. 이 때 17세의 어린 조광조는 스승에게 “아랫사람에게 언성을 높여 함부로 대함은 군자의 도리가 아니다”고 충고했고, 김굉필은 제자의 충고를 겸손하게 수용했다고 한다. 조광조의 이런 원칙주의 기질은 훗날 개혁의 이상을 펼치기 위해 관직에 진출하여 중종의 신료가 됐을 때도 종종 나타났다. 그는 백성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국왕부터 제대로 해야 한다는 생각 아래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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