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익의 키는 세 자 세 치(약 1m)로 무척 작았다고 한다. 그러나 몸집은 작아도 누구보다 담대하고 사명감에 가득 차 있었다. 그는 국란의 위기 속에도 백성을 사랑하고 군비를 갖추어 나라를 수호했으며, 국왕을 호위했다. 이러한 공으로 이원익은 40여 년간 세 왕대에 여섯 차례 영의정을 역임하면서 국정의 중심에 설 수 있었다. 그럼에도 청렴결백해 아주 가난하게 살았으며, 비록 국왕이라도 잘못을 저지르면 신랄하게 비판하고 바른 소리를 했다. 병이 있어서였기도 했지만 큰 일이 없으면 관직에서 계속 물러나기를 원했으며, 왕이 내려주는 선물이나 녹봉을 사절했다. 이러한 자세는 조선시대 공직자의 모범이요, 선비정신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원익은 선조, 광해군, 인조 3대에 걸쳐 영의정을 지낸 종실(宗室) 출신의 현상(賢相)이다. 이원익은 태종의 왕자인 익령군(翼寧君)의 4세손으로 1569년(선조 2년)에 문과에 급제해 1634년(인조 12)에 죽을 때까지 65년간 관직생활을 했고 그중 44년간 재상의 직위에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이원익은 이조판서로 평안도 순찰사를 겸임해 관서지방을 방위하는 데 앞장섰다. 또한 이여송과 함께 평양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1595년(선조 28년)에는 우의정으로서 4도 도체찰사를 겸임해 성주(星州)에 부(府)를 두고 남쪽지방을 진무(鎭撫)했다. 뿐만 아니라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때는 78세의 고령인데도 불구하고 도체찰사가 돼 난을 평정했다. 무엇이 이원익으로 하여금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키는 데 앞장서도록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