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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2-09-11 10: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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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에는 탁월한 능력을 가졌지만 그것을 마음껏 펼치지 못한 불운의 리더들이 있었다. 명량해전에서 전사한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은 무장(武將)으로 생을 마감하기에는 너무도 아까운 인물이었다. 서인에게 폐위당하고만 광해군(재위 1608-1623) 역시 안타까운 지도자였다. 공적은 많고 허물은 극히 적은 명군(名君)이라서 하는 말이다. 이번 호에서는 비운의 지도자들이 지녔던 능력과 포부, 그리고 그들을 쓰러뜨린 운명을 이야기해본다.





난국을 돌파한 최고의 경영자 이순신
이순신은 난세가 키운 영웅이었다. 이름 없는 하급 무인으로 출발해 40세가 넘을 때까지 제대로 된 자리 하나 차지하지 못하고 지냈다. 그러다 임진왜란을 만나자 그는 국가의 명운을 개척하였다. 그의 탁월한 경영능력 덕분이었다.
이순신은 어느 장수보다 부하들을 지휘하는데 능수능란하였다. 작전지역에서 근무하는 지방관들 및 현지 양반들을 설득하는데도 으뜸이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그가 백성들의 절대적 지지와 신뢰를 얻었다는 점이다. 전쟁으로 뿔뿔이 흩어진 각계각층을 하나로 묶어 전쟁에 동원하는 놀라운 능력이 그에게 있었다. 이순신만큼 인적 물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조직 관리할 줄 아는 사람은 고금에 드물었다.
그의 리더십은 탁월한 공감능력에서 비롯되었다. 광화문 네거리에 우뚝 서 있는 우람한 구릿빛 동상과는 딴판으로 역사상의 이순신은 달빛만 고와도 잠을 이루지 못하는 섬세한 시인이었다.

가. 난세의 영웅 이순신
경영자 이순신의 성공비결은 무엇이었을까? 답은 ‘선비! 이순신’이었다. 그는 꼼꼼한 선비요, 탁월한 문장가였다. 18세기의 실학자 이덕무(李德懋, 1741-1793, 호는 靑莊館)는 역대 한국의 대표 문장가들 가운데 이순신을 포함했다. 간결하고 섬세한 이순신의 문예적 감수성, 이것이 인간이해로 승화된 것이다. 그의 문학적 상상력과 공감능력은 경영능력으로 피어났다.
이순신은 전쟁을 두려워하는 백성들의 공포심은 물론, 터줏대감인 시골양반들의 고충도 십분 이해하였다. 폭넓은 인간이해가 있었기에 그는 각계각층의 친구요, 보호자가 되었다. 그리하여 그 사람들과 함께 힘을 모아 누란의 위기에서 나라를 지켜냈다. 그는 인간경영에 성공하였기 때문에 불패의 신화를 쓸 수 있었다.
여기에 경계할 점도 있다. 그에게도 단점은 있었다. 우선 경쟁심이 지나쳤다. 그는 원균과 공을 심하게 다투느라 불필요한 잡음을 불러일으켰다. 또 어떨 때는 부하들에게 너무 가혹했다.『난중일기』곳곳에서 우리는 부하들을 사납게 매질하고 백성들의 목을 베는 이순신을 만난다. 그러면서도 그 자신은 상관의 명령에 그리 복종하는 편도 아니었다. 오랫동안 그가 미관말직만 전전한 데는 이러한 약점들이 작용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약점을 충분히 극복하고도 남을 만큼의 장점을 소유하였다. 그래서 구국의 영웅이 된 것이다.


나. 이순신, 전쟁을 준비하다
전운이 감돌자 이순신은 우선 전함부터 만들기 시작했다. 거북선도 지었다. 가까스로 거북선이 완성되었을 때 임진왜란이 터졌다. 그 완공이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조선의 역사는 영영 그릇되고 말았을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이순신은 무조건 싸우고 보자는 식의 맹장이 아니었다. 피차가 구사할 수 있는 모든 전략전술을 미리 부하들과 함께 다각적으로 검토한 다음 아군의 승산이 충분하다고 판단될 때만 출격명령을 내렸다. 그래서 이순신의 부하들은 포탄이 비 오듯 쏟아지는 전장(戰場)에서도 언제나 침착하였다. 사전에 전술을 충분히 협의하고 공유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우왕좌왕하는 적이 없었다. 전략의 공유와 소통이야말로 이순신의 승리제조기였다.
그는 스스로 군량을 확보하였다. 농지개발이 제대로 되지 않은 빈 땅을 찾아 수군이 직영하는 농장을 설치했고 그의 부하들은 틈날 때마다 물고기도 잡고 미역, 전복도 땄다. 왜란 중에 다른 장수들의 휘하에서는 굶어죽는 병사들이 속출하였지만 만반의 준비를 갖춘 이순신의 수군은 무사하였다. 권율과 원균 등은 군량부족으로 애로를 겪었고 그때마다 이순신의 도움을 받았다. 심지어 그는 굶주림을 호소하는 양반들과 일반 백성들에게도 자주 은전을 베풀었다. 이순신은 경영의 귀재였다.





『난중일기』를 보면 경영자 이순신이 보인다
이순신은 활을 든 선비였다. 『난중일기』에서 우리는 그런 이순신을 만날 수 있다. 이순신은 호랑이처럼 엄격하면서도 어머니처럼 자상하다. 자상하고 친절한 사람은 대개 엄격할 수가 없다. 하지만 이순신은 양면적이었다. 이순신다움이 여기 있었다.
그는 강철 같은 체력의 소유자도 아니었다. 자주 아팠다. 아파도 오래오래 끙끙 앓았다. 『난중일기』를 보면 그가 칼을 빼들고 검술을 연마했다는 구절은 보이지 않는다. 그는 활시위만을 당기고 또 당겼다. 활쏘기는 공자가 강조한 선비들의 수련 과목이었다.
나이가 들어서는 인맥관리도 잘했다. 수백 개의 부채를 미리 만들어두었다가 요로의 대신들에게 선물로 보냈다. 유자 또는 귤을 대신들에게 보내기도 하였다. 이순신은 지기 유성룡뿐만 아니라 자기를 위험에서 구해준 정탁 등 20명가량의 조정 대신들과 늘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는 명나라 장수들도 잘 어루만졌다. 선물공세와 기 싸움으로 그들의 오만을 평정하였다.
이순신의 승리는 선비정신에서 비롯되었다. 그의 문사적 기질이 소통과 공유의 리더십으로 표현되었다. 인간이해를 바탕으로 한 그의 경영은 언제나 성공을 보장했다. 만약 그가 다시 태어난다면 우리나라를 중흥시키고야 말 것이다. 이순신은 세종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비운의 위기관리자 광해군
광해군은 왕조재건에 목표를 두었다. 임진왜란으로 온 나라가 쑥대밭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 국제정세는 조선이 불리하기 짝이 없었다. 명(明)-청(淸) 교체기를 맞아 광해군은 실용적 외교 전략을 구사했다. 광해군이 후세에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다. 하지만 정치가 광해군은 결국에 실패하였다. 그가 국정파트너로 삼았던 대북파는 편협한, 소수파 정권이었다. 다수파를 권력에서 소외시킨 그들은 인조반정(仁祖反正)이라는 역풍을 맞아 침몰하였다. 실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가. 임진왜란을 통해 성장한 광해군
광해군이라면 아직도 폭군으로만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를 축출한 인조반정 세력은 ‘폐모살제’(廢母殺弟)’ 즉, 인목대비(1584-1632)를 폐출하고 이복동생 영창대군(1606-1614)을 죽였다는 도덕적 비난을 퍼부었다. 아울러 명나라를 배신하고 만주족을 가까이했다는 혐의도 광해군에게 씌웠다. 궁궐을 중수한다며 재정을 낭비하였고, 그 과정에서 풍수지리설을 지나치게 믿었다는 점도 도마 위에 올렸다. 요컨대 패륜과 실정 끝에 광해군은 몰락하고 말았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비난은 역사적 사실과 달랐다. 광해군은 국난극복에 가장 크게 공헌한 왕이었다. 그는 왜란 중에도 큰 공을 세웠다. ‘권섭국사(權攝國事)’로서 그는 조정의 일부 기능을 위임 받아 평안도, 강원도, 황해도 등지를 순회하며 민심을 수습하고 군사를 모집하였다. 한양이 수복된 다음에는 수도방위도 책임졌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이번에는 전라도와 경상도로 내려가서 군량과 군대를 모으고 무기를 조달하였다. 『난중일기』를 보면 전라도에 내려온 광해군이 이순신에게 장창(長槍)의 제작을 부탁했다는 내용도 있다. 이처럼 광해군은 일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조선팔도를 누비고 다니며 국난극복에 온 힘을 쏟았다.

나. 우선 무너진 왕조를 재건하자
우여곡절 끝에 옥좌에 오른 광해군은 전란으로 무너진 왕조의 기강을 세웠고 재건에 필요한 사업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가령 1608년부터 경기도에서 대동법을 실시한 것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그때까지는 각 지역의 토산물을 공물(貢物)로 바치는 공납제가 존재하였지만 법을 시행한지 오래되어 폐단이 심했다. 왜란 중에 그러한 모순을 직접 목격한 광해군은 왕이 되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잘못을 바로잡으려고 애썼다. 백성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광해군은 같은 맥락에서 양전(量田)사업도 단행했다. 임진왜란 때문에 인구이동이 심했고 황폐된 농지도 많았다. 더구나 전쟁 중 토지대장이 불타버렸기 때문에 세금을 정확하게 거둘 근거도 상실되었다. 이 역시 힘없는 백성들에게 큰 불편을 초래하였다.
광해군의 머릿속에는 늘 한 가지 생각이 자리했다. 백성들의 안위가 우선이었다. 실록에서 만나는 광해군은 성격이 침착하고 사려 깊은 왕이었다. 그는 현안을 여러 신하들에게 일일이 물어보아 백성들의 입장에서 결정하였다. 그는 늘 백성의 편에 선 왕다운 왕이었다.


다. 실리외교의 귀재
광해군은 국제적인 분위기에 민감하였다. 당시 한반도 북쪽에서 큰 소용돌이가 일어나고 있었다.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는 갈등이 생겨 마침내 전쟁으로 발전하였다. 광해군은 신중하였다. 그는 중국사정을 정확히 인식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민감한 그들의 내부사항도 일일이 탐지하였다. 아울러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여 광해군은 국경선 지역에 군사력을 증강 배치하였다.
광해군은 남쪽의 일본도 놓치지 않았다. 일본이 재침략해올 기미는 없는가를 신중히 살폈다. ‘기유약조’라는 조약을 체결해 평화를 정착시켰다. 전란 중에 포로로 끌려간 백성들도 되찾아 왔다. 돈을 주어서라도 반드시 우리 백성을 데려오는 것이 광해군의 뜻이었다.
광해군이 성리학적 명분에 얽매였다면 그처럼 유연한 외교 전략을 구사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왜란 때 명나라가 조선을 도와주었던 만큼 조선도 무조건 명나라를 도왔어야 했다. 그러나 광해군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싸워봤자 질 것이 틀림없는 명나라를 위해 조선의 백성을 희생시킬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광해군에게 소중한 것은 조선의 백성뿐이었다. 전란으로 죽고 다치고, 전염병과 굶주림으로 쓰러지고, 적군에게 포로로 잡혀 조국과 가족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가엾은 백성들을 그는 잊지 않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백성을 살리는 것이 광해군의 목표였다.

라. 실패한 비운의 리더
그는 훌륭한 왕이었지만 그에게도 약점이 있었다. 그는 서인과 남인 등 조정에서 소외된 정파들을 적절히 회유하지 못했다. 만일 제거해야 할 대상이었다면 과감히 숙청했어야 한다. 그런데 반대파를 제거하는데도 어설펐다. 결국 화근만 키워놓은 꼴이 되어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이로써 광해군은 왕좌에서 축출되고 말았다.
소통과 공감, 연대와 조화를 중시한 세종은 매사에 백성의 입장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하였고 그리하여 전례 없는 성공을 거두었다. 광해군 역시 거의 성공할 뻔 했다. 하지만 반대파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범용한 여러 왕들보다 오히려 못한 처지가 되었다.
뜻이 좋다고 언제나 결과가 좋게 나오지는 않는다. 인사가 만사라는 말도 있듯, 믿을만한 사람을 등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요즘도 거듭된 측근비리에 공천비리로 온 나라가 휘청거리고 있지 않은가. 경영자들은 광해군의 실패를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글 백승종 마을공동체문화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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