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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2-06-11 13:2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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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세기 한국은 후삼국 시대를 거쳐 고려로 재통일되었다. 견훤, 왕건, 궁예 세 영웅들이 각축을 벌이다가 융합의 리더십을 발휘한 왕건이 역사의 새판을 짰다. 그 시대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세 가지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첫째, 10세기 한국은 고대사회에서 중세사회로 넘어가는 전환점을 맞이하였다는 사실이다. 둘째, 그 시대 한국사회를 뒤흔든 세 영웅은 저마다 독특한 리더십의 소유자였지만 최종승리자는 왕건이었다. 그에게는 새 시대를 열어갈 특별한 리더십이 발견된다. 셋째, 9세기까지만 해도 비교적 완만하게 진행되던 역사적 흐름이 10세기에 이르러 갑자기 빨라졌다. 당시의 급격한 상황변화는 21세기를 방불케 할 정도였다. 역사는 절대로 반복되지 않는다. 그러나 비슷한 상황은 몇 번이고 연출된다. 역사를 통해 우리가 통찰의 지혜를 얻을 수 있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골품제를 넘어 문벌귀족사회로
 
10세기 이전의 고대사회는 무인(武人) 귀족이 지배하는 시대였다.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 중국, 서양 사회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유교의 영향으로 중국에서는 일찍부터 문무(文武)의 구별이 생겼고, 당나라 때 이르러 문사(文士)들의 지배체제가 확고해졌다. 문벌귀족들이 세상을 주도하게 된 것이다. 300년 늦은 10세기경 한국에서도 그러한 변화가 본격화되었다. 일본이나 서구사회에서는 이 변화가 매우 더디게 나타났다.
중세사회로 넘어가면서 한국사회에는 여러 가지 변화가 일어났다. 그 핵심은 골품제(骨品制)의 해체였다. 왕건은 신라의 골품제 사회를 완전히 해체하고 문벌귀족 중심의 사회가 들어설 계기를 마련했다. 골품제는 세습적 신분사회를 상징하는 용어였다. 최상위 신분인 성골, 진골을 제외하면 최상층 일반귀족인 육두품마저도 어깨를 펴지 못하였다. 왕건은 이러한 골품제의 장벽을 무너뜨렸다. 이 한 가지 점만 보아도 태조 왕건의 역할이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왕건과 더불어 한국사회의 미래를 놓고 쟁패를 벌인 영웅들의 리더십에는 어떤 특징이 있었을지, 간단히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미륵불교의 카리스마, 궁예
 
궁예의 리더십부터 이야기해보자. 그는 신라의 왕자였다. 헌안왕 또는 경문왕의 왕자라고 하는데 확실하지는 않다. 어떻든 신라의 왕족 또는 진골이었던 그가 왜, 신라에 반대하게 되었을까. 
당시 신라귀족사회는 정쟁으로 혼란하였다. 궁예는 왕위계승전에서 탈락하여 감히 대권을 넘볼 수 없는 어려운 입장이었다. 그래서 그는 영월의 세달사로 숨었다. 승려가 된 궁예는 미륵불교에 심취하여 종교적 카리스마를 키웠다. 나중에 그는 미륵하생(彌勒下生)의 신천지를 이룩하겠다는 구호를 내세우며 정치 사회적 변혁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제정일치의 신정(神政)을 기도한 특이한 인물이었다. 20세기 이란의 호메이니 같은 지도자였다.
 
 
전통적 용장의 리더십, 견훤 : 견훤은 신라의 장군이었다. 크게 보아 무인 귀족의 범주에 속하였다. 다만 그의 골품은 높은 편이 아니었다. 시골 태생이었던 그가 현달한 가문 출신임을 증명하는 근거는 전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조 교체의 야망을 품은 견훤이었다. 다만 그에게는 한국사회를 근본적으로 혁신하고자 하는 뚜렷한 의도가 없었다. 견훤은 망해가는 신라를 무너뜨리고 그 전통 위에 새 왕조를 개창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의 리더십은 용장(勇將)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다소 평범한 것이었다.
 
융합의 리더십, 왕건 : 왕건은 융합의 리더였다. 궁예가 종교적 성향을 띄었다면 견훤은 전통적인 방식으로 통일왕조의 재건을 기도했다. 그러나 왕건은 달랐다. 우선 사상적인 면에서 왕건은 당시의 주류 신앙인 불교의 굳건한 바탕 위에 새로 도입된 풍수지리설과 도참설을 적극 수용하였다. 또한, 통일신라시대부터 강화되고 있던 유교의 통치철학도 받아들였다. 요컨대 왕건은 불교, 유교, 민간신앙을 모두 통합하여 사상적인 면에서 융합을 시도하였다. 그는 또 견훤처럼 용맹을 앞세운 장수가 아니라, 너그러운 덕성의 소유자로서 포용력을 발휘하였다. 길게 설명할 필요 없이 융합의 리더십을 가진 왕건이야말로 새 시대의 총아였다.
 
 
1. 통할 듯했지만 결국 좌절한 견훤
중앙과 지방이 혼란에 빠진 9세기 후반, 각지에서 호족들이 일어나 독자세력으로 성장하였다. 그들 가운데 가장 먼저 두각을 나타낸 이가 견훤이었다. 그는 서남해안을 방어하는 장군으로서 최고의 야심가였다. 처음에 그는 현재의 순천지역에서 실력을 길렀다. 순천은 바다가 가깝고 내륙에 기름진 평야가 있어 유리한 조건이었다.
순천이 바다를 낀 평야 지대라는 점은 중요하였다. 논을 중심으로 발달한 벼농사의 중요성이야 두 말할 필요도 없겠다. 그에 더하여 서남해 연안을 따라 무역이 발달하였다는 점도 강조할 필요가 있다. 무역 루트는 국내는 물론 일본과 중국 등지로도 이어졌다. 그 길은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로도 뻗어 나가는 멀고도 큰길이었고 엄청난 부의 원천이었다. 
서남해안에 기반을 둔 견훤은 중부 지역의 호족들과 연합하여 신라를 거꾸러뜨리고자 하였다. 그는 전주에 입성해 후백제의 건국을 선포하고 왕을 칭했다(900). 927년에는 경주까지 쳐들어가 경애왕을 살해하고 경순왕을 옹립하였다. 그러나 신라의 왕을 죽인 다음에도 감히 신라의 종말을 선포하지는 못하였다. 신라 천 년의 무게를 감당하기란 쉽지 않았다. 이를 지켜본 세상 사람들은 머지않은 장래에 견훤이 새 통일왕조를 만들 것으로 기대하였을 것이다. 그는 용맹스런 무장이요, 지략이 출중하고 결단력이 있는데다 민첩하였다. 더욱이 이십 년 넘게 통치경험을 쌓은 터였다. 누구도 왕건의 정치력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또 외교에도 상당한 실적을 쌓았다. 일본에 사신을 파견했고, 중국의 후당에도 조공을 바쳐 백제왕의 칭호를 받았다. 오나라 월나라와도 수교했고 북쪽의 거란과도 친선관계를 유지하였다. 
어느 시대든 성공한 지배자는 경제적 기반이 튼튼했다. 서남해안으로 진출한 견훤 역시 서남부 지방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급성장하였다. 후백제의 수도에서 연전에 발굴된 견훤의 궁궐터는 규모 면에서 조선왕조의 정궁 경복궁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견훤은 한반도의 주인이 되지 못한 채 거꾸러졌다. 
견훤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그가 건설하고자 한 세상이 신라와는 과연 얼마나 다른지를 그는 설명하지 못하였다. 견훤의 후백제는 이름만 다를 뿐 신라왕조의 단순재생산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았다. 새 시대를 열기에는 이상과 포부가 부족한 견훤이었다.
 
2. 왕건만이 할 수 있었다
왕건은 달랐다. 그는 개성에 기반을 둔 토착 세력인 동시에 무역에 종사하던 해상세력이었다. 궁예나 왕건보다는 새 시대의 분위기에 썩 잘 어울리는 유리한 입장이었다. 그때는 혼란한 시기였기 때문에 무역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군사력은 필수요건이었다. 값비싼 물건을 지키려면 자위능력이 요구되었다. 
해상실력자였던 왕건 집안은 궁예의 군사력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재빨리 귀순하였다. 궁예가 더 성장하기 전에 연합정권을 창출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서해안 진출에 목말라 하던 궁예는 그들을 우대하였다. 만일 궁예가 현명한 지도자였다면 왕건 집안의 휘하세력을 자신의 직계 부하로 재편성하고, 왕건 일가는 서둘러 제거했어야 옳았다. 그러나 궁예가 미처 손을 쓰기 전에 왕건은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결국, 궁예는 왕건에게 쫓기는 형편이 되었다. 궁예가 독심술을 쓴다면서 왕건에게 반역행위를 고백하라고 압박했다는 설화가 있다. 뒤늦게나마 궁예가 숙청의 필요성을 알았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때는 너무 늦었다. 왕건은 심복들과 쿠데타를 일으켜 궁예를 몰아내고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왕건은 궁예의 등에 올라탄 셈이었다.
 
 

서남해안의 해상세력과 연대한 왕건
 
그 자신이 해상세력이었을 뿐만 아니라 왕건은 서남해안의 해상세력과 연대하였다. 10세기 한국사의 운명을 결정한 것은 곧 해상세력이었다. 육지에서는 견훤이 자신의 영향력을 계속해서 확대하였다. 가히 파죽지세(破竹之勢)라 일컬을 만하였다. 그러나 여기에 쐐기를 박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왕건이 휘하의 수군을 거느리고 적의 배후에 해당하는 나주지역으로 쳐들어가 대승을 거두었던 것이다.
나주와 목포는 연안무역의 거점이자 나주평야로 불리는 광대하고 비옥한 농경지를 가지고 있었다. 견훤은 해상세력 출신이 아니라서 왕건이 거느린 수군을 이기지 못하였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서남해의 해상세력이 왕건을 선택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해안을 따라 오르락내리락하며 라이벌이 되어 경쟁하기도 하였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해관계를 함께 하는 동업자였다. 관대하고 후덕한 왕건 일가는 이미 오래전부터 서남해안 각지의 해상세력들과 결탁하였음이 분명했다. 왕건의 후계자인 제2대 혜종의 외가가 나주지역이었다는 사실이 상징하는 바가 크다.
전주에 포진하여 기세등등하였던 견훤은, 왕건이 목포, 나주, 광주 등지를 장악하게 되자 함부로 멀리 출입하기가 곤란하게 되었다. 왕건은 적의 발목을 움켜쥔 셈이었다. 견훤은 누구보다 출중한 장군이었고, 그래서 멀리 경주까지 진출해 신라왕실을 위기에 빠뜨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왕건이 남서해안의 부유한 상인들을 이미 규합하였다는 사실 때문에 견훤은 늘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두려운 것은 왕건의 독특한 리더십이었다. 그는 견훤이나 궁예처럼 스스로 왕위에 오르지 않았다. 홍유, 배현경, 신순경, 복지겸, 박술희 등의 추대로 그는 왕이 되었다. 왕건은 견훤처럼 권위적인 리더가 아니었다. 그는 화합과 소통을 중시하는 후덕한 군주였다. 왕이 된 다음에도 그는 군사력을 키우는 것보다는 각지의 호족들을 위무하여 자기편으로 삼는데 치중하였다. 결혼정책을 통해 그가 각지의 호족을 포용한 것은 누구나 안다. 또 왕건은 ‘중폐비사(重幣卑辭)’의 정책으로 지지기반을 확대하였다.
그리하여 견훤과의 관계도 역전되었다. 친(親)신라의 중심세력인 안동의 호족들도 왕건을 지지하게 되어 견훤에게 결정타를 먹이게 되었다. 왕건의 포용력은 발해유민들까지 끌어안을 정도였다. 그들을 수용함으로써 고려는 고구려의 명실상부한 후계자가 되었다. 왕건은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이 벌어졌을 때에도 움츠려들지 않고 운명의 도전에 적극 대응하였다.
요동치는 시대의 혼란을 누구도 무력만으로는 막지 못했다. 그것은 왕건만이 할 수 있었다. 백성들의 세금을 낮추고, 발해유민을 포용하고, 무너져가는 신라왕실과 패망한 견훤을 받아들인 왕건만이 사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투철한 역사의식이 있어서 가능했다. 그랬기에 그는 남서해안의 해상세력들을 설득했고, 풍수도참설과 민간신앙, 불교와 유교를 융합하여 골품제를 넘어선 신(新)국가를 꿈꾸었다. 생태파괴, 양극화, 노령화와 청년실업 등 각종 문제로 몹시 시달리는 우리로서는 그의 융합 리더십을 부러워한다. 왕건, 그였더라면 아마 풀지 못할 숙제가 없을 것만 같다.



글 백승종 마을공동체문화연구소 대표(전 서강대학교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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